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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화) 악한 농부의 비유

하가다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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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당한 아들의 이야기

고난주간의 말씀 가운데 특별히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1장 33절부터 46절까지, 이른바 ‘악한 농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단지 한 민족의 역사를 넘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 그리고 그 언약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주님의 탄식이 담긴 말씀입니다. 고난주간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아들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포도원을 맡긴 주인의 마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 울타리를 두르고, 거기에 즙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세우고 농부들에게 쇠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3)

 

이 장면은 이사야 5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으시고, 온갖 정성을 다해 돌보셨지만, 그들은 들포도를 맺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배경을 가져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하여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집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하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농부들은 그 땅의 지도자들로 상징됩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위해 울타리도 두르고, 즙틀도 만들고, 망대까지 세우며 철저히 준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 철저한 준비가 드러납니다. 헬라어 ‘παρέδωκεν’(파레도켄, “넘겨주다”)이라는 동사는 단순히 위임하는 것을 넘어서, 신뢰 속에서 맡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결코 대충 다루지 않으십니다. 최선의 환경과 기회를 주시고, 그들에게 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이라는 포도원에 은혜의 울타리를 세우시고, 말씀과 공동체라는 망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포도원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맡은 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농부들은 그것을 자기 소유인 양 착각합니다.

 

이것이 타락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심을 망각하고, 주어진 은혜를 내 권리로 오해하는 순간, 우리는 농부가 아니라 강도처럼 살게 됩니다.

 

종들을 보내신 주인의 인내

시간이 흘러, 주인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종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종들을 하나씩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치며 모욕합니다. 이 장면은 선지자들의 사역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상징합니다. 구약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경청받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당했습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6)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줍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종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진노보다 자비에 더디시며,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농부들의 악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종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들을 죽일 음모까지 꾸밉니다. “내 아들이니 존대하리라” 하신 주인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히브리서 1장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아들은 단순한 메신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는 상속자니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명확하게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밖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이 아니라,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모욕당하시며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완고함과 하나님의 아픔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기회를 주시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그 기회를 거부합니다. 그 아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공의와 자비 사이에서 찢기듯 갈라지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2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메시아적 시편으로 고백하며 절기 때마다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찬양하는 그 말씀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밝히시ㅂ니다.

 

‘버린 돌’은 쓸모없다고 여겨진 것, 가치 없다고 무시된 것, 그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머릿돌은 건물의 가장 중요한 구조물로, 방향과 기준을 잡아주는 돌입니다. 사람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새 역사의 중심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무시하던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다시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죽임당하게 하심으로, 구원의 기초를 세우셨습니다. 고난주간의 십자가는 버림과 선택, 죽음과 부활의 역설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결론: 나는 지금 누구인가

이 비유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3)

 

이 말씀은 매우 날카롭고도 두려운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지 않은 자들에게서 그 나라를 거두어 가십니다.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직분이 있다고, 예배당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열매를 맺는가, 주인의 뜻을 따라 포도원을 경작하고 있는가, 이것이 판단 기준입니다.

 

고난주간은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며 감정적으로 슬퍼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과연 이 포도원 앞에서 어떤 농부인지, 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혹시 주님의 이름을 이용해 내 이익을 챙기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신 은혜를 마치 내 권리인 양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이니 존대하라.” 주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고, 포도원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죽음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고, 우리는 그 은혜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존귀하게 여기며, 맡겨진 포도원을 주인의 뜻에 따라 잘 돌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나라를 유업으ㅇ로 받게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 거절당하신 아들을 다시 마음 깊이 모시는 한 주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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