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월) 병든 자를 치유하심
고난 중에도 멈추지 않는 치유의 손길
- 마 21: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본문은, 고난주간의 격동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마태복음 21장 14절은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성전의 본질과 예수님의 사역 중심을 깊이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고난주간에 잘 묵상하지 않는 본문이지만 저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주의 오심의 본질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깨끗해진 성전, 임재의 회복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마 21:14) 이 짧은 구절은 바로 앞선 12-13절, 성전 정결 사건 직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고,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 이후에, 맹인과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이 흐름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내포합니다. 더러운 것이 제거되었을 때, 비로소 은혜가 임합니다.
본문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은 율법적으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로 분류되었던 이들은, 상징적으로 죄와 부정함을 대표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배척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나아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여기서 '나아오다'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προσῆλθον'(프로셀쏜)으로, 단순한 접근이 아니라 경배의 자세로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제물을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제물 없이, 중보자 없이, 예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성전이시며, 새로운 제사장이며, 새로운 제물이심을 선언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헬라어 'ἐθεράπευσεν'(에테라퓨센)은 단지 병의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고 온전케 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치유는 단순한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성전 출입의 자격 회복,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설 수 있는 신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 곧바로 회복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정결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다시 임하고, 병든 자들이 회복되는 자리로 성전이 다시 쓰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소외된 자들을 향한 시선
맹인과 저는 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병은 죄의 결과라고 여겨졌고, 사람들은 그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성전에서도 그들은 주변부에만 머물 수 있었고, 결코 중심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중심으로 그들을 부르십니다. 아니,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의롭고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의와 이기심에 찌든 자들보다는, 자신의 무능과 연약을 깨달아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더 귀히 여기십니다.
이 본문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사야 35장 5-6절은 메시아의 시대에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저는 자가 뛰게 될 것이라 예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성전에서 그 예언을 실제로 성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치유는 단지 개인적인 기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도래했다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맹인과 저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몸이 아픈 자들뿐 아니라, 영적으로 길을 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자들, 신앙의 걸음을 절며 겨우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이 본문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치유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건강한 척, 멀쩡한 척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만큼은 우리의 영적 맹목과 절름발이를 감출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주님께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회복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부터 시작됩니다. 은혜는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인정할 때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치유는 성전의 사명이다
본문은 매우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성전의 본래 목적을 회복시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 그리고 병든 자가 고침 받는 장소. 예수님은 성전을 다시 그런 자리로 회복시키십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가장 큰 고통을 향해 걸어가시는 주간입니다. 하지만 그 길목에서조차, 주님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곧바로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도 여전히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이 모습은 오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교회는 정결해야 하며, 동시에 회복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을 잃은 교회는 세상과 다를 바 없고, 치유하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환영하는 공동체, 기도가 살아있는 자리, 회복이 실제로 일어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조직이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성전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 성전에 임하셨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가? 여전히 형식과 자존심을 붙들고 주님을 피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연약함과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를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치유는 내 안의 탐욕이 엎어진 후에야 시작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은 반드시 회개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 없는 고난 묵상은 감정적 동정에 머무를 뿐, 실제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나를 치유하시기 위해 내 마음의 성전에 들어오십니다. 내가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반드시 나를 회복시키십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늘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성전에서 치유는 계속됩니다
마태복음 21장 14절은 단지 하나의 이적 사건이 아니라, 성전의 회복과 메시아 사역의 본질을 담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게 하신 후, 바로 그 자리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치십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정결함과 회복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성전은 어떤 상태입니까? 거룩함을 잃어버렸다면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야 합니다. 상처와 병으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느껴진다면, 더욱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고난 중에도 여전히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성전은 치유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반드시 회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앞에 머물기만 한다면, 그분의 손이 오늘도 우리를 만지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이 치유의 주님을 깊이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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