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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 금) 마 26:69-75 베드로의 부인

하가다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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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는 제자, 은혜의 회복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69-75)

 

고난주간의 깊은 밤, 그 밤은 단지 어둠의 시간이 아니라 제자의 내면이 무너지고, 다시 회복의 길로 나아가는 결단의 밤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75절까지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단순히 한 사람의 실패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인간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비추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다시 무너진 심령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복음의 거울입니다.

 

불타오르던 충성심, 그러나 현실 앞에 흔들리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 26:69)

 

베드로는 누구보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제자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뽑아 예수를 지키려 했던 그는, 스스로를 다른 제자들과 구분 지으며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주님의 곁이 아니라, 바깥뜰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단지 공간의 위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또한 이미 주님으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장의 관정 안에서 예수님이 신문당하실 때, 베드로는 거리를 두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거리감, 그 영적 거리감이 베드로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여종의 말은 사뭇 평범한 듯하지만, 베드로에게는 치명적인 질문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너도 그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은 단순한 사실 확인이지만, 당시 상황에서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고백은 곧 그와 함께 비난과 조롱, 심지어는 형벌을 감수해야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순간, 불타오르던 충성심은 현실의 위협 앞에서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마 26:70) 그 말은 단지 거절의 표현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부정의 언어였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반복되는 부인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마 26:71-73)

 

부인의 강도는 점점 세져 갑니다. 처음에는 여종 한 사람의 질문이었지만, 이제는 여럿이 모여 그를 주목합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 하며 부인합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저주하다’는 “καταθεματίζω”(katathematizō)는 신적 이름을 걸고 저주하거나, 자신에게 저주가 임하더라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단순히 거짓말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앙까지도 저버리는 극단의 반응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비겁한 제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두려움 앞에 무너지는 인간의 모습, 죄에 대한 유혹 앞에서 점점 깊어지는 타협과 회피의 과정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첫 부인, 두 번째 타협, 그리고 결국 자기도 모르게 저주까지 하게 되는 그런 영적 후퇴의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리두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에서 멀어지고,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기도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점점 예수님을 향한 고백에서 멀어집니다.

 

닭 울음과 눈물이 흐르는 자리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 26:74하-75)

 

그리고 닭이 웁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 말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말씀이 베드로의 가슴에 박힙니다. 베드로는 단지 자신의 실패를 자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주님의 음성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슬픔 속에 감춰진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통곡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κλαίω"(klaio)이며,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을 넘어, 마음이 찢어지듯 울부짖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의 배신 앞에서 무너진 자신의 존재를 마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그는 ‘밖에 나가서’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밖이라는 공간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직면하고 나갔습니다. 그 울음은 회개의 울음이었고, 그 울음 위에 주님의 용서와 회복의 은혜가 흘러내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베드로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 울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 후,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으로 다시 세우셨습니다. 실패한 제자는 용서의 자리로, 회개의 사람은 다시 사명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결론

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75절까지의 본문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연약함을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인했고, 저주했고,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이 기억났고, 그는 밖으로 나가 통곡했습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이 본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주님을 부인했던 순간은 없었는가. 세상의 시선과 판단 앞에서, 혹은 두려움과 자기보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적은 없었는가. 그 모든 기억 앞에서 우리는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죄책감이 아니라,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의 사랑 앞에 부끄러워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울음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울음입니다. 회개의 눈물은 새로운 출발의 기초가 됩니다. 주님은 그런 자를 다시 세우십니다. 베드로를 세우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회개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키십니다. 고난주간, 통곡했던 베드로의 자리에 우리도 함께 서서, 주님의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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