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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금요일에 드리는 기도

하가다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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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그러나 그저 금요일이 아니라, 역사의 중심이 송두리째 흔들린 날이며, 모든 세대가 무릎 꿇고 침묵하는 고난주간의 금요일입니다.
사람들은 이 날을 ‘성 금요일’이라 부르지만, 주님, 저에게는 차마 ‘거룩하다’고 부르기도 두려운 날입니다.
너무도 무겁고, 너무도 피비린내 나며, 너무도 처절하여, 이 날을 기념한다는 말조차 감히 꺼내기 어려운 날입니다.

당신은 밤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붙잡히셨고, 끌려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셨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그 입김으로 생명을 부여하신 피조물들 앞에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예배의 대상이, 예배하는 자들의 재판을 받으셨고, 만유의 주권자가 피조된 자들의 판결을 기다리셨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되고 역설적인 장면입니까, 주님.
하늘의 빛을 붙드시던 손이, 어둠에 익숙한 손들에 묶였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외치셨던 분이, 거짓 증언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이 얼마나 더 크고 깊은 진리를 담고 있었는지를, 저는 오늘 조금이나마 깨닫습니다.

그리고 빌라도.
어찌 보면 중립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실은 가장 비겁한 손을 씻었던 자.
진리 앞에 서 있으면서도, 진리를 외면하고 무리의 소리에 굴복했던 그의 재판은
오히려 인간 정의의 한계를 드러낸 역사의 심판대였습니다.
그는 두려워했고, 정치적으로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진리를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주님, 얼마나 많은 빌라도가 내 안에도 있는지요.
양심은 끓고 있지만, 결국 편안함을 택하고, 옳음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저의 얼굴이 그와 겹쳐 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조롱당하셨습니다.
자신이 만든 사람들로부터 침 뱉음과 채찍을 받으셨고,
왕이심에도 가시관을 쓰셨으며,
진정한 권세를 가지셨음에도 붉게 물든 장난감 망토를 덧입으셨습니다.
병사들의 손은 차갑고 거칠었으며, 그 웃음은 잔인하고 조롱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항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칼을 들지도, 천사를 부르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기력해 보이는 그 침묵 속에서,
하늘의 구속은 점점 완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외쳤던 그의 음성은,
오늘 제 안의 비겁한 목소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백의 자리에서는 담대하지만, 위험이 찾아오면 물러서고,
십자가의 고통이 손끝에 닿을 때는 신앙을 포기하는 저의 모습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베드로를 끝내 품으셨고, 회복의 아침을 허락하셨음을 저는 압니다.

그리고, 십자가.
무거운 나무가 당신의 어깨를 짓눌렀고, 피와 땀이 엉긴 얼굴은 침묵 속에서도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골고다’, 해골의 언덕.
그곳은 인간의 죄가 극에 달한 자리이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낮아진 자리였습니다.
당신은 못에 박히셨고, 갈비뼈 사이로 창이 찔렸으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뒤 숨을 거두셨습니다.

주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며 한 사람의 비극이라 여겼고,
어떤 이는 그를 ‘자칭 메시야’라고 조롱했고,
제자들은 흩어지고, 어머니는 눈물로 옷자락을 적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무너진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 그 순간,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은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인간적으로 실패한 날처럼 보였습니다.
사랑은 짓밟히고, 의는 꺾이고, 진리는 무너진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가 덮였고,
그 상처 속에서 모든 병이 낫기 시작했으며,
그 죽음 안에서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이 역설의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모든 것이 부서지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고 있었고,
모든 것이 버려지는 그 길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온전한 모양으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묻히셨습니다.
바위 무덤에, 사람 손에 안긴 채, 그 침묵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조차 당신을 가둘 수 없음을 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육은 눕혀졌지만,
당신의 뜻은 자라고 있었고,
당신의 사랑은 그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주님, 오늘 저는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며,
제 안의 죄를 마주합니다.
그 못 자국에 내 욕망이 박혔고,
그 찢긴 살에 내 교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안에서
나는 용서받았고,
나는 새로 태어났고,
나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날은 참으로 두려운 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깊고 찬란한 사랑의 날입니다.
주님, 이 고난주간의 금요일,
제가 이 사랑을 잊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 앞에 서는 자로 살게 하소서.
고통의 무게 속에서도 구속의 영광을 바라보며,
다 이루셨다는 그 한 마디가
제 삶의 시작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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