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목요일에 드리는 기도
주님,
고난주간의 목요일 저녁, 오늘 저는 깊은 떨림과 숨죽인 고백으로 당신 앞에 섭니다. 온통 피비린내 나는 이 역사의 정점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거룩한 밤이었던 그 유월절의 저녁을 떠올려 봅니다. 출애굽의 밤, 문설주의 피 아래에서 죽음이 비켜갔던 그 밤처럼, 이제 당신 자신이 어린양으로 서서, 인류의 문설주를 피로 덮기 위해 조용히 떡을 드시고, 잔을 드시던 그 만찬의 방 안을, 오늘 제 마음속 깊이 받아 안고자 합니다.
주님, 그 방은 단순한 식사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격전의 자리였고, 사랑의 절정을 눈물로 써내려간 자취였습니다. 당신은 떡을 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 말씀하셨고, 잔을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주님, 그 말씀은 거룩한 유언이었고, 피를 담은 시였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이 부서질 것을 미리 아셨기에, 사랑은 갈등을 이기고, 불안은 결단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그 자리엔 배신의 손길도 있었습니다. 떡을 함께 나눈 손, 밤마다 불을 쬐었던 그 손이, 당신을 팔기로 작정하고 떡을 받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슬프게,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 하셨을 뿐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참으셨고, 은혜는 끝까지 허락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런 사랑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너그러우시고, 그렇게 다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저는 무릎 꿇은 채, 이 만찬의 그림자에 잠깁니다.
주님, 당신은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일어나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왕이신 당신께서, 주인이신 당신께서,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신 손에 들린 대야는 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흙먼지를 씻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교만을 씻고, 나의 완고함을 씻고, 인류의 오만을 무너뜨리는 물이었습니다. 저의 발도, 그대처럼 더럽고 무딘 걸음을 걸어왔지만, 주님은 한 번도 그것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릎을 꿇고 제 발을 감싸 쥐시던 그 낮아짐 속에서, 하늘의 높이를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 저도 그렇게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나보다 연약한 자를 위해, 상한 자를 위해, 사랑으로 무릎 꿇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감람산,
그 어두운 밤, 제자들이 졸음에 겨워 쓰러져 있을 때, 당신은 홀로 땀방울이 피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 그 절규는 저의 절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프기 싫고, 피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으니, 그 기도는 너무도 인간적인 절망의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당신의 고백,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그 한 줄의 순종 앞에 저는 무너집니다. 기도의 마지막은 늘 하나님의 뜻 앞에 머무는 것임을, 당신은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얼마나 자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했는지요. 얼마나 많은 눈물이 하나님의 뜻을 밀어내기 위한 간청이었는지요. 감람산의 그 기도 속에서, 당신은 이기셨습니다. 땀방울이 피로 바뀌어도, 결코 아버지의 뜻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기도는 도피가 아니라 헌신이었고, 두려움 앞에 선 항복이 아니라, 사랑 앞에 선 순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의 횃불이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칼과 몽둥이를 든 자들이, 당신을 체포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 무리의 앞장엔 당신을 팔았던 제자의 입맞춤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차가운 입술이었을까요. “라삐여, 안녕하시옵니까”라는 그 인사 속엔 더 이상 존경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입맞춤에도 “친구여”라 부르셨습니다. 사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체포당하는 그 순간조차, 칼을 휘두르던 제자를 말리시며, “검을 거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그렇게 평화의 왕이셨고, 그렇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셨습니다.
주님, 이 목요일, 저는 너무 많은 감정을 안고 당신 앞에 있습니다.
사랑과 배신, 결단과 고통, 고요와 전투, 순종과 피…
이 하루는 너무 많은 상징과 너무 깊은 진리로 가득 차, 제 기도조차 두려울 만큼 벅차오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날을 지나며 배웁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도망치지 않으셨고,
사랑은 끝까지 참으며,
순종은 두려움을 껴안고 걸어가는 것임을.
오늘 제 삶도 그 만찬의 떡처럼, 누군가에게 나눠지는 은혜가 되게 하시고,
그 대야의 물처럼, 이 세상을 씻어내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기도는 나를 숨기려는 벽이 아니라,
나를 드리는 제단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깊은 밤의 고백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대표기도문 > 기타기도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을 맞이하며 드리는 감사의 기도 (0) | 2025.04.01 |
---|---|
부활 주일에 드리는 기도 (0) | 2025.03.27 |
고난주간, 토요일에 드리는 기도 (0) | 2025.03.27 |
고난주간, 금요일에 드리는 기도 (0) | 2025.03.27 |
고난주간 기도, 수요일 (0) | 2025.03.27 |
고난주간 화요일에 드리는 기도 (0) | 2025.03.27 |
고난주간 월요일에 드리는 기도 (0) | 2025.03.27 |
사순절 대표 기도문 (0) | 2025.03.12 |
댓글